<라디오스타 박칼린 대학가요제 출전 과거>
뮤지컬 음악감독 박칼린이 10월 21일 라디오스타에 출연해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이날 방송에서는 박칼린의 대학가요제 영상이 공개됐는데요, 박칼린은 앞서 한 방송에 출연해 대학가요제 출연에 대해 언급하며 "저도 옛날에 대학가요제에 한번 참석해 본 적이 있다"라며 "미주에서 대상을 받았다"라고 전한 바 있습니다.
1989년 대학가요제에 출연했던 박칼린은 당시 폭발적인 가창력을 자랑하기도 했는데요, 박칼린은 "저 때가 대학교 1, 2학년인가? LA에서 대학가요제 미주 예선에 참가했다. 그런데 그때에 일등 상품이 전자 피아노였다. 200만원 정도의 고가 상품이어다. 그리고 미주 예선 통과시 한국행 비행기 티켓을 줬다. 통과하게 되면 한국이나 놀라 갔다 오자, 아버지 보러 갔다오자 라는 마음이었다"고 회상했습니다.
박칼린은 소피마르소 닮았다, 티파니 닮았다 는 말에 여유있게 웃으며 "제가 LA 출신이다 보니까 사막의 비라는 곡을 써서 나갔다"며 "박칼린 대신 박영미로 참가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어 "재미로 작곡해서 나가보자 했는데 어쩌다보니 미주 대표로 본선에 가게 됐다"면서도 본선 성적에 대해 묻자 "본선 성적은 기억이 안난다"라고 답했습니다. 이에 김구라는 "성적이 별로였나보다"라고 농담을 했는데, 박칼린은 기억이 난 듯 "아 그때 우승자는 전유나 씨였다"며 20대를 추억했습니다.
<박칼린 프로필 본명 한국명 나이 고향 국적 학력 소속사 집안 과거 성장과정>
-박칼린(뮤지컬 음악감독), 박칼린 프로필 본명 한국명 나이 고향 국적 학력 소속사
박칼린의 본명은 칼린 수 팍(칼린은 아일랜드의 소녀라는 뜻)이라고 하구요, 한국명은 박영미라고 합니다. 박칼린의 나이는 1967년 5월 1일생으로 올해 나이 54세이고, 고향은 미국이며, 현재 국적 또한 미국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박칼린의 가족으로는 아버지 박근실, 어머니 아이린 박, 언니 킴 박, 켈리 박이 있구요, 박칼린의 학력은 초량초등학교, 경남여자고등학교, 캘리포니아예술대학 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악 전공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 소속사는 킥 뮤지컬 아카데미 소속(대표, 음악감독)이라고 합니다.
-박칼린(뮤지컬 음악감독), 박칼린 집안 과거 성장과정
박칼린의 한국인 아버지 박근실은 부산광역시 출신으로 전쟁 때문에 온 나라가 쑥대밭이 된 1950년대 미국에 있는 대학으로 유학을 떠난 유복한 집안의 엘리트 학생이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당시 해외 유학생이 우리나라 전체를 통틀어 20명 정도였다고 하니 얼마나 부유하게 자랐는지 알만한데요, 당시에는 대통령이던 이승만이크리스마스 카드를 이들에게 직접 써서 보낼 정도였다고 하네요.
박칼린의 아버지는 대학 재학 중, 5살 때 미국으로 이중한 리투아니아계 이민자 가정의 칼린의 어머니 아이린을 만났다고 하는데요, 아버지가 동양인인데도 키가 190cm가 가까울 정도로 건장한 체격이어서 학교 학생들 사이에서도 유독 눈에 띄었으며, 어머니가 아버지를 놀리기 위해 아버지 앞에서 노래한 아리랑을 계기로 인연이 생겼다고 합니다. 또한 두 사람은 조국이 전쟁을 겪었고, 또 둘 다 해외로 이주한 이방인이라는 공통점 역시 통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둘이 만나 낳은 세 자매 중 막내 박칼린은 미국에서 출생하고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70년대 초반 박칼린의 나이 3살 때 아버지를 따라 부산으로 온 가족이 귀국해 10살 때까지 부산 초량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박칼린은 이때 처음으로 음악을 접했다고 하는데요, 당시 그의 집 근처 초량시장에 무용 견습소가 있었는데, 그 안에 피아노실이 있었다고 하네요. 무용을 배우러 갔던 그는 피아노실에 난로가 있는 걸 보고 어린 마음에 따뜻한 곳에 있고 싶어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후 박칼린은 아홉 살 때 고향인 LA(LA헐리웃 지역)로 돌아가 바이올린을 하던 언니의 권유로 첼로를 배웠다고 하는데요, 박칼린은 "자세부터가 불편한 피아노보다 첼로가 몸에 자연스레 흡수되는 듯해 내게 참 잘 맞는 악기였다"고 회상했습니다.
첼로는 박칼린이 음악에 눈을 뜨는 기회를 제공했고, 한국에 사는 동안 영어를 잊었던 그는 다시금 미국에 정착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면서 자연히 첼로에 몰두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박칼린은 서서히 실력이 쌓이자학교 오케스트라에 발탁, 연주에 참여하는 날이 이어지게 되었는데, 어느 날 연극부와 합동공연을 하면서 그에게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고 합니다.
연극반 담임이었던 미스터 영 선생이 조용히 앉아 첼로를 연주하는 그를 눈여겨봤고 연극에 투입시킨 것이었습니다. 그대 박칼린은 1인 5역을 연기하며 처음으로 뮤지컬 무대에 서게 되었다고 합니다.
전혀 모르던 사이였던 미스터 영 선생이 자신을 재능을 발견해준 것에 대해 "그는 내가 이러한 길을 반드시 갈 거라든지, 아니면 가야만 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박칼린 : "저는 누구보다 존재감이 없는 아이였어요. 말도 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죠. 하지만 영선생은 그런 절 눈여겨보았고 제게 스스로 빛이 나게 살아가는 것에 대해 힌트를 주셨어요. 그때 무대에 서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해서든 첼로는 그럭저럭 잘 켜는 연주자가 됐겠지만 인간이 눈부시게 아름답게 살 수 있다는 건 알지 못했을 거예요?
박칼린은 중간에 고등학교 때 1년 동안 부산 경남여자고등학교를 다녔다고 하는데요, 방학 때 한국을 방문한 후 언니들은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박칼린은 혼자 남아서 한국 고등학교를 다녀보고 싶다며 고집을 부렸다고 하네요.
캘리포니아에서 첼로를 전공한 박칼린은 한국에 들어와 서울대에서 국악작곡 석사 학위를 땄다고 합니다. 또한 박칼린은 한국 생활을 시작하며 틈틈이 정극, 뮤지컬, 음악극, 무용(작곡) 등 기회가 주어지면 가리지 않고 공연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박칼린(뮤지컬 음악감독), 박칼린 판소리 명창 박동진의 제자
그러던 중 박칼린은 대학원 세미나에서 우연히 만난 판소리 명창 박동진 선생의 눈에 띄어 소리를 배울 기회도 얻었다고 하는데요, 실제로 박동신이 그녀를 자신의 판소리 직계 전수자로 삼고자 했지만 박칼린이 한국 국적이 아닌 외국 국적이었기 때문에 성사되지 못했다고 하네요. 이 일로 박동진은 매우 서운해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박칼린은 "네가 외국 국적인 게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는 박동진의 말 한마디에 모든 마음이 풀렸다고 하는데요, 박칼린은 만약 그때 그 일이 성사되었다면 자신은 판소리의 길로 아주 깊이 빠져들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박칼린에 따르면 박동진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아따 저 양년 참 한국말 잘하네잉"이라고 했다고 하는데요, 당시 서울대학교 국악곽에서 국악을 전공중이던 그녀는 하와이에서 열린 국악 공연에 국악계 인사들의 통역 자격으로 따라갔었는데, 그녀가 국악을 전공했다는 것도 알지 못했던 박동진이 불현듯 "자네는 소리를 해야 쓰것네"라며 그녀를 제자로 삼았다고 합니다.
-박칼린(뮤지컬 음악감독), 박칼린 데뷔 및 활동(연극배우 -> 뮤지컬 배우, 음악 감독)
박칼린은 국내 뮤지컬 음악감독 1세대로, 1966년 뮤지컬 명성황후에 들어갈 음악을 만들어 실력을 인정받은 후 지금까지 뮤지컬 음악감독이라는 타이틀로 살아가고 있는데요, 하지만 그도 원래는 무대 위에 섰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박칼린은 우선 부산 시립극단에서 연극배우로 활동을 하다가 서울의 대학로로 자리를 옮겨 1987년 연극 불의 가면에서 처음으로 음악감독을 맡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연극에 음악을 접목하는 것은 큰 역할이 아니었고,
또 가난한 연극판에서 전문적인 음악인을 쓸 수도 없는 형편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연극배우 중에 미국 대학과 서울대 석사 출신의 음악학도인 박칼린에게 일을 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박칼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이 맡은 역할을 잘 해내게 되었고, 이후 결국 대한민국 1호 창작뮤지컬 명성황후의 음악감독을 시작으로 크게 성공하게 되었답니다.
1995년에 관객에게 선보인 명성황후는 배우도, 시설도 준비되어 있지 않던 황무지였을 때 박칼린은 1995년부터 1997년 미국 뉴욕 공연까지 명성황후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일부 제작진들은 외국 출신이던 박칼린에게 불신감을 보이기도 했는데요, 그러던 중 어느 사건으로 인해 박칼린이 이정받는 계기가 왔다고 합니다. 명성황후 대본과 기본작곡은 되어 있었는데 편곡은 전혀 되어있지 않았던 상태였을 때,
20대 초반이었던 박칼린은 호주로 달려가 피아니스트 둘이 피아노 앞에서 녹음기 하나 켜놓고 백지 상태였던 모든 음향효과와 배경음악 등을 말로 표현하면서 밤새 만들어갔고, 모든 편곡이 완성되고 CD가 완성되어 이를 들고 한국에 오자마자 연습실로 달려가 음반을 들려주었다고 합니다.
배우와 제작진 30-40명이 모두 앉아 박칼린이 만들어온 것에 주목했고, 주요 장면들의 배경과 조명, 음악들을 목소리로 묘사하고 모든 배역의 노래를 다 부르면서 2시간 넘게 공연을 혼자 재연하자 제작진들의 기립박수가 이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뮤지컬 명성황후는 1997년 한국 창작뮤지컬 최초로 미국 브로드웨이에 진출했고 2011년까지 1000회 이상의 공연을 기록하게 되었다고 하네요.
박칼린은 이후 2002년 오페라의 유령, 2004년 노트르담의 곱추, 2006년 아이다, 2009-2010년 시카고 등 70편이 넘는 작품을 선보였는데요, 박칼린은 주로 신시뮤지컬컴퍼니에서 렌트, 시카고 등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작 뮤지컬의 음악감독을 맡았다고 합니다. 박칼린은 특히 렌트의 경우 한국 초연부터 2011년 공연까지 모든 공연의 음악감독직을 맡았으며 2011년 공연에서는 연출을 맡았다고 하네요.
박칼린은 또한 음악감독 외에 뮤지컬 배우로 무대에 서기도 했는데요, 2011년 11월부터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에 배우로 출연하기도 했으며, 2011년과 2012년 방송되었던 코리아 갓 탤런트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영화 고지전 마지막 부분에서 병사들의 합창 부분을 지도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한 박칼린은 2014 인천 장애인 아시안 게임 개 폐막식 연출 감독과 미스터 쇼의 연출을 맡기도 했으며, 2018년 5월 22일 개막한 뮤지컬 시카고에서 벪 켈리 역을 맡아 연기하기도 했습니다.
-박칼린 남자의 자격, 박칼린 리더십
박칼린은 우리나라 뮤지컬 음악감독의 개척자였던 것인데요 하지만 박칼린이 무엇보다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남자의 자격 합창단을 맡게 되면서였습니다. 특히 당시 남자의 자격 합창단 편이 방송되는 동안 박칼린 리더십이 화제가 됐는데요,
방송 이후 곳곳에서 훌륭한 리더십의 사례로 꼽혔고 여타 방송이나 광고 출연도 늘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하루에 200-300통의 전화가 올정도로 많은 섭외요청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후 박칼린은 남자의 자격 합창단 시즌2를 이끄는 자리는 고사했다고 하네요.
당시 박칼린은 "20년 동안 일하면서 사람 보는 눈이 생겼어요. 전 오디션 때 늘 기술보다 인격과 인성을 보려고 해요. 사람이 안 돼 있으면 아무리 실력이 있다한들 결과가 좋지 않기 때문이죠. 뮤지컬은 모든 것을 최소로 압축해 통합시킨 장르예요. 음악을 연주하는 인원도 오케스트라에 비해 절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모두가 똑같이 중요하죠. 스태프는 배우를, 배우는 스태프를 항상 소중히 여기라고 강조하죠"
실제로 뮤지컬 배우들 사이에서는 그를 두고 공공연히 인정하는 하나의 정설이 있다고 합니다. 칼린 쌤은 누구든 노래하는 것을 들으면 곧바로 사람의 성격과 인성을 꿰뚫어본다는 것, 그 역시 "노래를 듣지 않아도 문만 열고 들어오면 어떤 사람인지 보인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박칼린 조승우
박칼린은 수년간 배우들을 캐스팅하며 좋은 작품을 위해선 좋은 사람이 바탕에 있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고 하는데요, 그가 이러한 철학으로 발굴한 배우들은 현재 뮤지컬계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데 그중 배우 조승우도 있다고 합니다.
박칼린은 조승우에 대해 "백 년에 한 번 나타날까 말까 하는 배우"라고 평하기도 했는데요, 두 사람의 인연은 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합니다. 당시 뮤지컬 명성황후가 성활이에 막을 내리고 재공연에 들어가면서 고종 역할을 할 배우가 필요했을 때 박칼린은 적절한 배우를 찾기 위해 다른 뮤지컬 작품을 관람하며 사람들을 조용히 관찰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박칼린은 의형제라는 작품을 보러 갔고 그중 떠벌이의 역할을 맡은 배우가 기억에 남아 명성황후 제작사 대표에게 그를 추천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제작사 대표의 학교 제자였는데 오디션을 보는 과정에서 박칼린의 마음을 더욱 사로잡아 고종 역할에 캐스팅됐다고 합니다.
박칼린 : "승우는 기본적으로 실력이 있는 데다 굉장한 노력파여서 연습을 하는 동안 제가 더 좋은 음악인이 되도록 긴장시켰어요. 이후 1년에 한 번씩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됐고 몇 년 뒤 승우는 영화와 뮤지컬 쪽에서 대스타가 됐죠. 그는 누가 발견할 그런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모든 걸 다 하는 사람이예요. 혼자서 뭔가를 끊임없이 개척해나가기 때문에 저는 그가 뭔가를 필요로 할 때만 도움을 줄 뿐이죠. 이렇게 멋진 친구들을 만날 때면 저 또한 굉장한 자극을 받아요"
-박칼린 사람을 보는 안목
박칼린은 언제 어디서 좋은 사람을 만날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마음을 열어둔 채 삶을 살아간다고 합니다. 타인을 위한 배려가 몸에 밴 것에 대해서는 "어린 시절 부모님을 통해 교육받은 것"이라고 말했는데요, 그의 어머니는 미국에서 ESL 교수로 일했는데 때문에 주변에 늘 외국인 유학생이 많았다고 합니다.
박칼린 : "어머니는 자신의 학생들 중 어리거나 미국 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워하는 학생, 특별히 신경 쓰고 싶은 학생이 있을 때 우리 집에 하숙을 시키셨어요. 저희 세 자매는 어린 시절 다양한 인종의 언니 오빠들과 수년을 함께 살았죠"
박칼린 : "저녁식사 시간에는 원형 식탁에 둘러앉아 꼬박 3시간씩 식사를 했는데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세상을 엿볼 수 있었어요. 하루는 여자와 남자의 역할에 대해 토론이 벌어졌는데 브라질, 멕시코에서 온 남학생들이 남성우월주의자로 일본 여학생에게 여자의 영역을 가르치려 하자 멕시코 여학생이 공룡시대에 살고 있냐며 문화싸움이 벌어지기도 했죠"
박칼린은 그렇게 초등학교 때부터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동서양의 문화를 체득하고, 다양한 만남을 통해 인생의 폭을 넓힌 덕분에 박칼린은 지금 현재 좋은 리더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 같네요.
-박칼린(뮤지컬 음악감독), 박칼린 결혼 남자친구 이상형
박칼린은 원래 결혼을 했었다가 이혼을 했다고 합니다. 박칼린의 전남편은 연극인 유흘상씨인데, 원래 성격은 별 문제가 없는데, 일에 더 집중하기 위하여 이혼을 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부산 레퍼토리시스템의 창단 10주년 기념 멕베스 공연에 전남편과 함께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박칼린은 아직까지 재혼하지 않고 혼자 살고 있는데요, 박칼린은 배우 최재림과 종종 열애설에 휩싸이며 화제를 모은 바 있습니다.
박칼린과 최재림은 박칼린이 근무하는 스튜디오에 최재림이 수강생으로 들어오면서 인연을 시작, 박칼린이 유명세를 치른 KBS 프로그램 남자의 자격 에 최재림이 보컬 트레이너로 등장하며 주목을 받았는데요, 최재림은 2009년 뮤지컬 배우로 데뷔, 에드거 앨런 포, 리타, 트레이스 유, 넥스트 우 노멀, 어쌔신, 가야십이지곡 등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배우 최재림은 "남들이 보기에 친해 보였던 것 같다"며 쿨하게 언급하며, 뮤지컬 렌트와 헤어스프레이 등에 박칼린 감독이 참여하면서 남다른 오해가 불거졌다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앞서 박칼린 역시 최재림과의 열애 의혹에 대해 해명한 바 있는데요, 박칼린은 "과거 연하남이 좋다라고 말한 게 와전이 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박칼린은 "동성애자라는 소문도 있던데, 미국에서 다니던 학교에 동성애자들이 많았었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남자를 좋아한다"라고 해명했습니다.
또한 박칼린은 자신의 이상형에 대해서 한 매체를 통해 "특별한 기준은 없다"면서 "날 찾아주지 않아서 문제"라고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이어 박칼린은 "형석씨 아내 같은 사람이면 나도 결혼하고 싶다"며 "요리를 정말 잘 한다"고 부러움을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한편 박칼린은 지난해 자신이 결혼하지 못한 것에 대해 한 방송(냉장고를 부탁해)에서 "내가 남자 양파 써는 모습을 못 봐서 아직 결혼을 못했나보다"라고 말하기도 해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박칼린 신장, 시한부 삶?
박칼린은 신장이 안좋아 시한부 삶을 살고 있다는 말이 돌기도 했는데요, 실제 박칼린은 신장이 많이 안좋다고 합니다. 박칼리은 이에 대해 과거(2010년) 한 인터뷰에서 "2002년 피로때문에 병원을 갔다가 양쪽 신장이 모두 손상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병원에서 신장이식을 권고받았지만, 평생 투석해야 한다는 말에 치료를 포기했다"
"신장이 안 좋다. 한번 안 좋아진 신장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더라. 그래서 나는 아픈 것을 잊고 산다. 양쪽 신장에 다 문제가 있어서 앞을 4,5년 정도 살 수 있다고 한다"고 했습니다.
이에 박칼린이 시한부 삶을 살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는데요, 하지만 박칼린은 이에 대해 "분명 제 신장은 나쁜 상황이에요. 하지만 신경 안쓰고 살고 있고 아픈 사람치고는 나름대로 깔깔거리며 건강하게 지냅니다. 물론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나면 신장을 갈아끼워야 할지도 모르지만 시한부 인생으로 불릴 정도는 아니에요'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박칼린은 "만약 5분 뒤에 죽는다고 해도 후회가 없어요. 진짜 저는 후회 없이 살았어요. 남들이 나만큼만 행복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전쟁이 없을 것 같아요. 내가 갖고 있는 에너지를 다 뿌리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지금 가도 여한이 없어요"라고 했습니다.
박칼린은 현재까지도 잘 살고 있는 것 같네요~~ 앞으로도 더욱 건강하길 바라구요, 멋진 작품들 기대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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