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수미 이혼, 은수미 남편과 이혼한 다음의 삶입니다.
사실 이혼 당시 은수미에게는 개인적으로 안 좋은 일들이 연달아 덮쳤죠.
# 목차
* 은수미 고문 후유증으로
* 은수미 교도소 생활
* 인간의 바닥을 본 은수미
* 은수미 노동 전문가로 활동하며
* 은수미 이명박 박근혜 시대에
* 은수미 국회의원이 된 다음
* 은수미 음주 국감의 진실
* 은수미 필리버스터
* 은수미의 꿈
* 은수미 고문 후유증으로
결국 은수미는 수술 후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게 됩니다.
하지만 고문 후유증은 오래동안 그녀를 괴롭혔죠.
은수미: "구속되기 전 (사노맹) 동료였던 남편과 산에 올라 길을 잃은 적이 있었다. 그 때 나는 남편에게 "걱정하지 마라. 길을 찾아서 내려간다"고 말할 정도로 거칠 것이 없던 사람이었다."
은수미: "하지만 (고문 후에는) 산에 가서는 등산조차 하지 못할 만큼 정신적인 타격이 컸다. 산 중턱에 미처 가지도 못한 채로, 더 이상 한발짜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멍하게 서 있었다. 산을 내려가지도, 또 올라가지도 못한 채..."
은수미 전남편: "(고문 후 은수미의) 당당하고 똘똘했던 그 모습이 완전히 사라져서 사람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이렇게 오랜 재소와 고문 후유증으로 은수미는 아이도 갖지 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국회의원 은수미 사진
* 은수미 교도소 생활
또한 교도소에서의 생활도 비참했죠.
(원래 은수미는 사노맹 사건으로 15년 형을 구형받았는데, 결국 총 6년동안 감옥에서 보내게 됨. 1992년 입소, 1997년 출소)
은수미: "당시 교도소는 냉난방이 전혀 되지 않았다. 강릉에 있을 때, 한겨울에 일어나보니 내 몸을 제외한 모든 것이 다 얼어 있었다. 또한 여름에는 변기에서 구더기가 올라와 방 바닥에 막 기어 다녔다."
은수미: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재소자들은 서로 드잡이하고 한 사람을 나쁜 사람 만들어서 괴롭히기도 했다. 당시에는 내의 같은 배급품들이 항상 부족했기 때문에 그것을 얻기 위하여, 사람들의 폭력과 위계가 난무했다."
은수미: "(재소자들에게 커피가 공급되지 않는 상황에서) 어떤 오십대 아주머니가 커피를 그렇게 마시고 싶어했다. 그러자 이십대 교도관이 (장난삼아) 노래 3곡을 하면 커피를 주겠다고 햇다."
은수미: "그러자 이전까지 노래 한번 안해본 그 오십대 아주머니는 딸뻘인 교도관 앞에서 진지하게 노래 3곡을 다 불렀다. 처음에는 성가 2곡을 부르고, 마지막으로 동요 '나비야'를 불렀다. 교도관 역시 처음에는 장난으로 시작했다가 아주머니가 너무 진지하게 노래를 부르니까 놀란 것 같더라."
커피 한잔에도 자존심을 버릴 수 있는 것이 사람이라는 존재이죠.
* 인간의 바닥을 본 은수미
은수미: "헝거 게임이라는 영화는 링을 만들고 그 안에서 소수만이 살아남는 게임을 시키는 내용이다. 그런 헝거 게임이 교도소내에서도 벌어진다."
은수미: "대다수가 (본인의 자그마한 이익을 위하여) 그런 헝거게임을 하게 되는데, 그래도 그걸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많은 정치범이 그러하고, 또 정치범이 전혀 아닌 사람들중에서도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그런 (악의적인) 룰을 거부하더라."
은수미: "교도소내의 90%는 나쁜 꼴이었다. 거의 대부분이 추한 모습들이었다. 하지만 나머지 10%는 그래도 감동적인 모습이다. 사람이 사람을 보호하고 서로 아껴주고 위로하는 모습... 거기에 희망을 가졌다."
이후 은수미는 1997년 교도소에 출소하고 1998년 학부 졸업, 1999년 석사 과정에 진학, 2001년에는 박사 과정에 진학하게 됩니다.
(1999년 결혼함)(국회의원 은수미 결혼)
은수미: "감옥 생활을 하기 전에는 나는 항상 에너지가 넘친다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출소 후에는 말 그대로 죽은 시체와 같았다."
은수미: "감옥에 있으면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성적인 치욕감을 느꼈다. (고문당하면서) 말을 하지 않으면 '어떤 상황(성고문)이 벌어질 것'이란 협박과 위협이 얼마나 사람을 공포에 떨게 하는지, 그리고 정신을 피폐시킬 수 있는지 온 몸으로 체험했다."
은수미는 서울대에서 (학사, 석사, 박사를)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게 되지만, 취업 진로가 막힌 상황이었습니다.
* 은수미 노동 전문가로 활동하며
은수미: "대학 시절 주변 학생들이 내 별명을 전교 1등이라고 지어주었다. 그만큼 공부 잘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정말 아무것도 안하고 오로지 공부만 한다는 비아냥거리는 측면도 있었다."
은수미: "하지만 나는 그렇게(오로지 공부만) 했어야 했다. 내가 (이십대인) 그들을 따라가려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었으니까. 그때 이십대는 영어 원서도 쉽게 읽고 하는데, 나는 겨우 더듬거리면서 읽는 정도였으니까."
은수미: "2004년에 박사 학위를 받게 되었을 때 취직이 쉽지 않았다. 나이는 이미 마흔이 넘었고, 빨간 줄도 가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은수미: "그 때 총리실 산하 한국노동연구원에서 공고가 떴다. 당시 (경쟁자들중에서) 미국 박사들도 많았는데, 나는 네트워크 분석을 시도해서 공채는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가 되었다고 하더라. 하지만 전과 경력때문에 최종 결정이 나지 않았다."
은수미: "결국 최종 결정이 한달동안 내려지지 않자, 송호근 선생님(은수미 지도 교수)이 직접 거기에 방문하셨다. 그리고 "내가 모든 걸 보증한다"라고 아주 강력하게 어필하셨다."
사실 공무원이나 정부 산하 단체처럼 보수적인 기관에서 전과자를 뽑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죠.
이후 은수미는 노동 전문가로 성장하게 됩니다.
본인의 노동 운동 경험과 서울대 박사까지 하면서 치열하게 공부한 이론으로 무장한, '현장과 이론에 밝은' 전문가가 된 것이죠.
* 은수미 이명박 박근혜 시대에
하지만 결국 은수미는 이명박 정권때 퇴사하게 됩니다.
은수미: "(이명박 정권하에서) 저는 완전히 좌빨이 되고 해고 1순위가 되었어요. 아예 청와대에서 제가 경향신문 칼럼을 못쓰게 하더군요. 그리고 저뿐만 아니라 동료 연구원들 역시 함께 치기 시작했고요."
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을 나오기 직전에 봉급 30%를 감봉당했어요. 구조조정이라는 명분으로 그랬죠. 또한 (정부 압력으로) 은수미가 그만두면 (정부의) 용역을 주겠다는 거에요."
은수미: "정말 고민 많이 했어요. 나 혼자 당하면 모르겠는데, (나를 빌미로) 연구원 자체가 공격을 받으니까요. 그래서 나만 떠나면 여기 다른 사람들이 좀 편해지지 않을까... 이런 고민을 많이 했어요."
결국 은수미는 한국노동연구원을 퇴사하게 되는데,
이 2007년 전후로 은수미는 개인적으로 여러가지 안 좋은 일을 겪게 됩니다.
은수미: "당시에 이혼했고, 또 (몇개월 뒤에) 아버지도 돌아가셨고..."
* 은수미 국회의원이 된 다음
이후 은수미는 재야에서 노동 전문가로 활동하다가 2012년 민주통합당의 국회의원(비례대표 3번) 제안을 받고 국회에 입성하게 됩니다.
은수미: "국회의원 취임 이후에, (2012년에) 대통령 선거가 있었어요. 선거 당일 날, 아홉 시 반에 불을 끄고 수면제를 먹고 잤어요. 어떻게 박근혜가.. 라는 생각뿐이었어요."
은수미: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고 전화기를 켜니까, 처음 들어온 소식이 노동자들의 자살 소식이었어요. 그 때 (절망한 노동자들이) 줄줄이 자살을 하셨어요. 그래서 쫓아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자살하지 말라고, 제발 죽지 말라고 말렸어요."
* 은수미 음주 국감의 진실
이후 은수미는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는데, 여러가지 흑색선전에 당하기도 합니다.
'은수미 음주 국감' 역시 이런 흑색선전중의 하나이죠.
중앙일보 보도
- 은수미 의원이 취기가 있는(음주를 한) 상태에서 "(새누리당이 이석채 회장의 증인채택을 반대하면) 기업 살인에 동조하는 것"이라고 주장했고, 결국 국감을 파행으로 몰고 갔다.
은수미 주장: "KT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이석채 KT 회장에 대한 증인 채택을 (새뉘당이) 거부하는 이유는 뭐냐?"
은수미: "중앙일보 기사에서 나를 마치 술에 취해 말더듬이가 된 것처럼 묘사했고, 국감 아침에도 사실 왜곡이라는 날벼락을 당했다. 만약 녹취록이 있는지, 있으면 공개해서 (은수미 음주 국감) 기사 보도가 사실인지 밝혀라."
결국 은수미의 정면 반박으로, '언론중재위원회의 조정'으로 중앙일보는 반론보도를 하게 됩니다.
다만, 기사가 났을 때는 굉장히 큰 이슈가 되었지만, 나중에는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흥미를 잃게 돼죠.
* 은수미 필리버스터
이후 은수미는 필리버스터로 큰 주목을 받았고,
20대 총선에 성남시 중원에 출마하게 됩니다(은수미 지역구).
은수미: "사실 저는 (국회의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을 꽤 했다고 생각했어요. (노동) 전문가로서 정책적인 일을 할만큼 했고, 또 많이 바꿨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실제로는 하나도 안 바뀌는 거에요. 당도 바꾸지 못하고 정치도 바꾸지 못하고..."
이처럼 은수미는 현실의 한계를 절감하게 됩니다.
국회의원 한명의 힘으로는 시대의 큰 조류에 맞설 수가 없죠.
그럼에두 불구하고 은수미는 국회의원이 되기 위하여 출마하게 됩니다.
과연 은수미에게는 어떤 꿈이 있기에 계속 도전하는 것일까요?
은수미: "내가 말하는 노동자는 일하는 모든 시민을 말한다. 일하는 시민에게는 노동의 권리가 있고, 또한 시민적 권리가 있는데, 이 두 가지는 노동의 앞 뒷면과 같은 것이다."
은수미: "내가 국정원 사태때문에 한동안 전국 투어를 했는데, 노동 현장에 있는 사람이 "은수미 의원님, 그런 것 좀 안 하면 안 되냐?"라고 하더라. 자기들은 당장 죽겠는데, 내가 2주 동안 국정원 싸움을 하고 있으면 어떡하냐고..."
은수미: "하지만 정치적 민주주의가 안되면, 일상의 민주주의 역시 무너지잖아."
사실 절망한 노동자들이 자살하는 노동현장도 급하고,
또 선거에 불법 개입하는 국정원을 똑바로 세우는 것 역시 급합니다.
무엇을 먼저 해야할까요?
* 은수미의 꿈
은수미: "협동조합운동을 보면, 대부분이 중산층이 그런 걸 해. 그런데 내가 만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그런 경험조차 가질 수가 없다. 삶이 조각조각 나 있고, 또 한곳에 제대로 거주할 수도 없으니까."
은수미: "(비정규직 노동자를 포함한) 대다수 국민들이 유목민들처럼 떠돌아다니는데, 어떻게 이 사람들이 공동의 유대, 새로운 사회를 경험하게 할 수 있겠나."
은수미: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이 좋아져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더 높은 지위에 올라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가' 때문이다. 그런 여가를 가져야 노동자들 역시 정치적으로 소통할 수 있고, 자기 이웃은 어떻게 살고, 또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으니까."
결국 은수미가 바라는 이상향은 '여가가 있는 노동'이고, 이 여가를 통하여 사람들이 스스로의 삶에 주체가 되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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